Traveller/Triathlon

마라톤 풀코스 첫 완주기 - 담배보다 독한 인연.

토왕폭 2008. 10. 20. 15:15
대회명 : 제4회 문화일보 통일 마라톤 대회(42.195Km)
일자 : 2002년 9월 29일

날씨 : 흐리다 비오다 햇빛나다 종잡을 수 없는 날씨였음

공식 기록 : 기록(넷타임) - 4:07:54
구간기록 - 1:33:56(About 19Km)
2:37:16(30Km)
3:19:16(35Km)

착용 운동화 : ASICS DS-Trainer

프롤로그

하프코스 첫 출전 2002년 6월 23일. 풀 코스 첫 출전 2002년 9월 29일.
마라톤을 하리라 마음먹은지 4개월만에 도전하는 풀코스다. 잘 할 수 있을거라는 믿음은 있다. 난 나를 믿는다. 체력으로 안되면 악으로, 깡으로...
힘든 순간일수록 마터호른에서의 그 차갑던 밤이 떠오른다. '죽고싶다'라는 생각을 어렵게 기어나올 때 아무렇지도 않은 듯 받아들이던 그 순간을 난 아직 잊지 않고 있다. 아니, 평생 그 순간은 내게 끊임없는 채찍으로 다가올 것이다.

잘하는 짓일까?

새벽 5시. 긴장감이었을까? 일찍 잠자리에 들었지만 몇 번의 의식을 확인하며 잠에서 멀리한 시각이다. 샤워를 하고, 밥을 먹고, 의식를 치르 듯 버호표 달려있는 옷을 꿰어 입는다. 그 위로 트레이닝복을 한겹 덧 씌운다. 인절미와 몇가지 먹거리를 들고 차에 오른다.

자유로. 1995년. 집은 일산이고, 사무실이 종로에서 양재동의 이사를 했다. 매일 왕복 100여Km의 길을 출퇴근하다 지쳐 떠나온 도시 일산. 3호선의 종착역 대화역에 차를 파킹하고 셔틀버스에 오른다. 수 많은 달림이들을 싣고 남아있는 자유로는 내쳐 달린다.

임진각. 통일대교. 우리는 일년에 몇 번씩은 이곳을 떠올린다.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그러나 이곳을 생각하는 의미가 모두 같은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통일. DMZ.

고민을 한다. 진통제. 아직 내 다리는 정상적인 레이스를 하기에는 문제가 있다. 얼마나 버텨 줄 수 있을 지 알 수 없다. 그래도 포기는 싫다. 시작해보지도 않고 접을 수는 없다. 입안에 떨어넣는다. 얼마간의 약효가 나를 받쳐주겠지. 이 많은 사람중에 아무도 없다. 주위를 둘러보며 참가하신다고 했던 강마분들을 찾아보지만 사막에서 바늘찾기인가? 그래도 탈의실 입구에서 한 분을 뵈었다. 반갑게 인사드리고...

10:00 출발의 총성이 울리고 꽃가루가 휘날리는 그 길을 뛰어 나간다. 오늘은 풀 코스 첫 도전이기도 하지만 얼마전에 구입한 심박계를 테스트해보기로 했다. 모든 것은 춘천에 맞추에 준비히고 있으니 그 전까지는...

흥분때문이었을까? 별로 빠르지도 않으데 165의 심박수를 표시한다. 이후로도 페이스를 160~170에 맞추어 치고 나간다. 5min/Km

코스모스속에 갇힌 해바라기

내 고향의 주로를 떠올린다. 넓은 평야지대를 가로지르는 주로. 아직 그 길을 두 발로 달려본적은 없지만 어린시절 잔차에 몸을 의지해 달리던 기억이 떠오른다.

코스모스. 황금 빛 들녘. 주름진 아버지의 얼굴. 문득 초등학교 교가가 생각이 난다. '황금 빛 물결치는 곡창 내 고장...옛 태봉 도읍터...' 지금 쯤 내 고향 들녘에는 가을걷이가 한창이겠지. 소 달구지 대신 내 키만한 바퀴의 트렉터가 논 한가운데를 달리면 낟알을 털어내고 있겠지.

고향생각에 신선주(神仙走)를 하다보니 작은 읍내를 지난다. 서울 도심을 달리는 기분은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오늘, 그리고 춘천에서 쓸만한 기록이 나오면 내년 동아를 뛰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본다.

주로표지기에서 익혔던 파주시 종합운동장을 휘감아 도는 최고의 언덕을 치고 올라간다. 벌써 몇명의 달림이들이 걷는다. 다시 한번 다짐한다. 걷지는 않으리라...

중간 칩 체크 시스템이 설치되어 있다. 1:34분. 조금 지나니 19Km표지기가 놓여있다. 아직까지는 무난하게, 그리고 감히 SUB-4를 떠올린다. 건방지게...

25Km이정표를 지난다. 아직은 특별하게 느껴지는 증상은 없다. 그냥 지나는 차들이 뿜어내는 매연에 기분이 상할뿐이다. 출발시에는 어깨를 부딪히던 사람들은 다 어디간것일까? 기껏 한 줄로 늘여져 줄 지어 가는 모습이라니... 또 하나의 언덕을 넘어 30Km이정표를 향해 발 걸음을 옮긴다.

걷고 싶지 않았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5min/Km은 무리였을까? 페이스가 떨어진다. 다리는 무거워져 간다. 또 이건 무슨 일인가? 그 동안 말썽을 부리던 오른쪽 다리는 얌전히 버티어 주는데 왼쪽 허벅지가 당겨오다니...

걸었다. 끝내는 걷고 말았다. 그렇게 걷지 말자고 다짐했는데... 걷는것보다 느릴지언정 걷지 말자고 다짐했는데 언덕에서 걷고 말았다. 모든 것이 그렇던가? 한 번 걸었더니 이제는 툭하면 걷는다. 합리화. 눈물이 난다. 울컥되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심호흡을 뱉어낸다.

언제 보았을까? 판문점 26Km이정표를... 이제는 그 이정표가 11Km를 가르키고 있다. 임진각 3Km를 가르키면서... 이제부터라도 걷지 않으면 가능할듯 싶었다. 그러나 끝내는 다시금 걷는다. 이제는 조금만 뛰어도 명치부분을 때리며 숨쉬기가 곤란하다. 심박수는 150~155정도인데... 어느곳 하나 쓸만하게 남아있는게 없단 말인가?

담배보다 독한 인연이 떠오른다. 며칠 전. 내가 그녀에게 건넨 말이다.
"넌 아마도 내게 담배보다 더 독하게 중독되었나봐...."
"-_-;;;;"
"담배는 쉽게 끊었는데... -_-;;; 히유~"

얼마안되는 시간동안이지만 지금까지 살면서 이런적이 없었는데, 나의 모든것이 한 순간에 무너지고 나름대로의 원칙이 일 순간에 사라지게 만든 그녀다. '내 것이 아니라면 빨리 버려라. 그것이 얻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안된다. 몇 번의 시도끝에 인정하기로 했다는... 엄청난 적수를 만났다는...

통일대교를 바라보이는 마지막 언덕이다. 지친다. 통일대교 반환점을 돌아나오는 달림이들이 부럽다. 40Km. 이제 굴러가도 된다. 욕심도 버린다. 하프 번호표를 달고 계신분들이 골인점 한참 전까지 나와 응원을 한다. 주로옆에 늘어선 사람들. 골인점이 가까워지긴 했나보다. 주위를 둘러본다. 혹시라도 놓쳤던 연을 찾기 위해... 골인점을 지난다. 딸랑딸랑하는 전자음이 "넌 이제 끝났어. 가서 쉬어도 좋아"하는 듯하다. 친구가 이름을 부른다. 몇 걸음을 옮긴다. 그녀다.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42.195Km내내 담아왔던 얘기가 있었는데 그냥 웃어보이는 그 모습에 마음이 환해진다.

커다란 시계는 4:08분을 넘어가고 있다. 아쉬움은 없다. 만족할 만한 결과다. 끝내 걷지 말자고 한 나하고의 약속은 저버렸지만 풀코스에서의 주로 운영법을 터득한것만으로 충분히 가치가 있는 시간인것 같다.

에필로그

이제 난 하나의 강을 건넜다. 어린시절 생각했던 하나의 꿈을 이제 이룬것이다. 마라톤 풀코스 완주. 그것이었다. 기록은 애초에 의미가 없었다. 그러나 나도 인간이지라 숫자놀음에 민감해져가는 것이 씁쓸하기는 하다.

높아간다. 가을 하늘만큼 내 마음도, 이제는 애써 접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끝내 내것이 될 수 없을지라도, 지난 시절의 나를 모두 부정해서라도 함께 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할 것이다. 담배보다 독한 인연이여...

폭(2002. 0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