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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常茶飯事

인연 & 멘토

며칠 전 누군가에게 이제 4살, 2살인 아이들이 무엇이 되기를 바라는가?라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나는 그저 일상적으로 건강하고, 지혜로운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고 했죠.
집요한 질문자는 무엇을 요구하더군요. 난 그 무엇에 의견을 달 수가 없었습니다.
내 아이들의 삶이 제 것이 아니기도 하지만 무엇을 위해 산다는 것이 그리 행복한 삶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때문이었습니다.

나는 질문자에게 답변을 만들어 내는 것을 포기하고 내 아이들이 닮았으면 하는 바램이 있는 누군가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지금은 멕시코의 꼴리마 대학에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나름의 찬란한 인생을 살고 있는 녀석이랍니다.

나와는 등산학교의 강사와 학생으로 만났던 인연. 
내 아이들에게 멘토를 소개해야 한다면 주저없이 인연을 만들어 주고 싶은 녀석.

아래 글은 박사학위 논문데이터를 만들기 위해 코스타리카에 있을 때 녀석이 보냈던 편지입니다. 다시금 읽으면서 눈시울이 촉촉해짐을 느낍니다. 이 녀석를 처음 접했을 때의 마음. 그리고 이 녀석의 글 속에서 전해오는 단상들.

기회가 되면 멕시코에 들러 싸구려 양주 '조우커'의 병을 비워가며 눈짓을 나누어 보고 싶은 욕심이 생기네요.



P/S 한 친구의 인생이 묻어 있는 글로 내용이 무척 깁니다. 참고로 아래 글의 주인공은 처자이고, 나와는 등산학교 사제지간으로 만났었고, 지금도 가끔은 메신저를 통해서 소식을 주고 받고 있네요. 이 녀석을 생각하면 항상 입가에 미소를 머금게 되는 좋은 제자죠.


1. 나는 아주 어려서부터 항상 집 떠나는 것을 동경해왔습니다. 내가 어려서 살던 동네에서 조금 걸으면 목포에서 신의주에 이른다는 1번국도가 지나는데(그 때는 그저 신작로였음), 밥만 먹으면 저는 신작로로 나가서 하염없이 서울로 가는 완행버스를 기다렸습니다. 물론 제가 타고자해서 그랬던 것이 아니고, 그저 창문을 휘휘 열고 달리는 버스를 향해 손 한번 흔들어주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속으론 항상 ‘나도 언젠가는 저 버스에 몸을 싣고 보란 듯이 창문 휘휘 열고 달려보리라’ 굳게 맘 먹었습니다.

 

2. 그러다가 국민학교 6학년이 되었을 때 전 아주 중대한 결심을 했습니다. 그 때 처음으로 ‘관광버스’라는 것을 타봤는데, 그 때 본 관광버스 운전수라는 직업은 그야말로 이 세상을 제가 살아가기에 가장 퍼펙트 한 것으로 판단되었습니다. ‘세상에,,,, 조선 팔도를 유람하고 다니는 것도 그저 감지덕지 할 판인데,,, 돈까지 벌 수 있다니’, ‘그래 관광버스 운전수가 되는거야’

 

3. 관광버스 운전수가 되겠다는 꿈은 고등학교 때까지도 이어졌던 것 같습니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친구들과 어울려서 시내에 나갈 일이 종종 있었는데, 저는 여관 앞만 지나가면, 괜히 잠이 오고,, 그저 여관에서 한번 자봤으면 소원이 없겠다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느날 우연한 기회에 저는 아버지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아버지 저는 여관 앞만 지나가면 막 들어가서 자고 싶어요”. 그저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이었는데 그 때 아버지는 저으기 놀라시는 눈치셨습니다. 그 때 아버지 답은 그랬습니다. “워디서 계집애가 그런 소릴 허는겨,,, 워디가서 절대 그런 소리허믄 안되여….” 그냥 그 말을 하지 말았을 것을 그랬는가 봅니다. 정말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이었는데,,,,

 

4. 중학교하고 고등학교 때 수학여행을 갔습니다. 친구들은 열악한 음식과 잠자리 때문에 이틀째부터는 빨리 집에 돌아가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전 집에 돌아갈 날이 가까워오면 올수록 점점 더 우울해 졌습니다. ‘아~~ 그냥 이렇게 계속 돌아다니고 싶은데’. 몇 해 전 여름방학에 오랜만에 집에 내려가서 뒹굴뒹굴 마루에 누워서 엄마랑 지난 추억들을 이야기 하다가 아무런 생각 없이 엄마한테 말했습니다. “엄마, 난 중학교 때하고 고등학교 때 수학여행만 가면, 그렇게 집에 돌아오기가 싫더라”. 그저 아무런 생각없이 한 말이었는데, 엄마는 저으기 놀라시는 눈치였습니다. “울애기가 워찌 그랬실꼬,,,,, 아가! 우째 그랬던겨,,, 왜 그 때는 그런 말을 안했던겨?,,, 그때 집에 무신 문제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워찌 싫었던겨?”. 아~~ 그게 아닌데, 집이 싫었던 것이 결코 아닌데,,, 그저 집 떠나는 것이 좋았을 뿐인데,,, 하여간, 그날 엄마한테 무심코 했던 한 마디로 울엄마는 하루종일 혼잣말로 중얼거리시면서 슬퍼하셨습니다. “시상에,,, 울애기가 워찌 그랬실꼬,,, 시상에,,, 울애기가 워찌 그랬실꼬,,,”. 그냥 그 말을 하지 말았을걸 그랬는가 봅니다. 정말 아무 생각없이 한 말이었는데,,,,

 

5. 스물 세살 먹던 해 정월이었습니다. 친구랑 친구의 약혼녀랑(물론 지금은 친구의 부인이 되었지요) 그리고 저랑 셋이서(우리 셋은 서로가 볼 것 다보고 알 것 다 알아버린 아주 절친한 사이였습니다) 눈이 펑펑 내리는 겨울 초저녁부터 ‘길손네’라는 이름의 막걸리 집 구들에 엉덩이를 지지면서 강냉이 튀밥에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습니다.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취중에 내린 결론은 ‘산으로 가자’였던 것 같습니다. 친구의 약혼녀는 부모님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아 동참을 하지 못하고 저와 제 친구는 그날 밤, 강냉이 튀밥에 막걸리를 남겨둔 채 눈 펑펑 내리는 전주역에서 전라선 밤차를 탔습니다. 그때 무서울 것이 무엇이 있었겠습니까? 무식이면 용감이라는데,,,, 메트리스보다 먼저 챙긴 것은 전주역 홍익매점에서 산 6천원짜리 싸구리 양주 ‘조우커’하고 5킬로 그람짜리 팔뚝보다 큰 햄이었습니다.

 

6. 우여곡절 끝에 자정을 넘겨 적막에 쌓인 백무동 입구에 닿았고, 땀으로 범벅 된 머리 뒤통수에 고드름이 어는 것도 모르는 채, 친구와 저는 히히덕 거리며 계곡물 얼음 깨먹어가며 별 바라보고 그렇게 참샘을 향해 올랐습니다. 눈 위에 텐트를 쳤습니다. 산 속에 아무도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저 기분에 들떠서 친구랑 저는 햄을 썰어 굽고 조우커를 땄습니다. 황홀했습니다. 강냉이 튀밥에 막걸리만 마시던 속이었으니,,,, 그 얼마나 환상적이었겠습니까.

 

7. 새벽 녘이 다 되어 잠을 청했습니다. 메트리스도 없이 눈 위에 친 텐트 속에서 얇은 침낭 하나만 달랑 믿고,,, 썰어 먹던 햄을 배게 삼아 그렇게 잠을 청했습니다. 그런데,,,잠인들 왔겠습니까? 참 겁도 없지요. 소지봉 너머로 여명이 올라올 때까지 이를 갈았던 기억 뿐입니다. 술기운에도 생각은 있었던지,, 잠들면 얼어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이 생각 저 생각,,, 그러다가 문득,,, 내 어릴 적 꿈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관광버스 운전수가 된다고 했는데, 난 지금 무엇을 하고 있지? 어디로 가고 있지?

 

8.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장터목에서 긴 밤 내내 겨울 바람이 텐트를 걷어버릴 것만 같이 몰아칠 때도, 세석 설화의 황홀경을 헤메일 때도 온통 생각은 어릴 적 꿈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배게 삼아 배고 자던 햄이 점점 줄어들고,, 몇 병 사들고 갔던 우리의 희망 ‘조우커’도 빈병으로 쌓이고,,, 그러면서 생각이 점점 분명해졌습니다. ‘목아지(목숨)를 걸고 할 수 있는 일을 찾자’.

 

9. 어릴 때부터 동경해 오던 서울로 가던 신작로, 여관, 집 떠남, 관광버스 운전수에 대한 종합판을 찾았습니다. ‘지리학’이라는 학문이었습니다. 중.고등학교때 머리 빠개지게 외워대던, 석회석은 어디서 나오고, 철광석은 어디서 나오고, 무연탄은 어디서 나오고, 그런 지리한 학문이 아니라, 그야 말로 땅 위에 발 딛고 사는 사람들에 대한 이해의 학문인 지리학이라면 목아지를 걸고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근데, 사실 그 당시만,, 그렇게 장엄하고 숙연했지,,, 지금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맘만 먹으면 학문을 빙자?해서 멋있게 한 판 잘 놀 수 있는 학문인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참 탁월한 선택이었던 것 같습니다. 역시 칠성음료에서 만들어진 ‘조우커’의 위력은 대단했던 것 같습니다.

 

10. 맘 먹고 공부를 시작한지 만 8년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 동안 깨달은 진리가 있다면, 저는 아무래도 머리 보다는 몸이 더 잘 돈다는 것입니다. 항상 책상보다는 현장이었고, 미국에서 갓 나왔다는 따끈따끈한 논문 보다는 어슬렁거리며 휘적휘적 돌아다니다가 귀동냥해서 주워듣는 너무도 일상적이고 단순한 대화 속에서 더 찐한 감동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같이 공부하는 사람들은 나를 ‘무개념적 원칙주의자’라고 합니다. 항상 머리 쓰기 이전에 몸으로 때운다고,,,

 

11. 제 인생은 아무래도 싸구랴 인생인 것 같습니다. 섬마을 술청에서 하숙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술청이래 봤자 구멍가게를 겸한 마당 한 구석에 소주박스 수북하게 쌓아놓고, 동네 사람들이 오매가매 들러 ‘말뚝고뿌(맥주컵)”로 소주 반 병 따라 쭉 마시고 아무나 빨래줄에 걸어놓은 망둥어 한 마리 구워먹으면 되는, 그런 소박하지만 인심이 훈훈한 집이었습니다. 처음엔 그런 집에 기숙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조금 찜찜 하기도 했는데, 한 달 여 시간이 흐르면서 아줌마 아저씨들이 막소주 마실 때 옆에서 망둥어도 얻어먹고 쭈쭈바 하나씩 얻어 먹으면서 이야기를 듣고,,,,, 하여간 그렇게 살면서, 참 그 동안 내가 사람들에 대한 이해를 추구하면서도 나 자신은 너무도 동떨어진 삶을 살았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느 순간에는 마치 한편의 다큐멘타리 영화 속에 출연하고 있는 기분이 들 정도였습니다. 모든 것이 열악한 상황이었지만, 참 황홀했던 순간이었습니다.

 

12. 사람들은 가끔 제게 묻습니다. 왜 코스타리카로 갔냐고, 이곳 사람들도 제게 묻습니다. 왜 코스타리카로 왔냐고,,,, 굳이 핑계를 대자면, 상당히 고상한 답이 나올 수도 있겠으나, 실은 가장 원초적?인 선택의 이유는 ‘엘 꼰도르 빠사’라는 노래였습니다. 한국에서는 ‘철새는 날아가고’라는 다소 촌스러운 제목으로 소개되어 있기도 합니다. 코스타리카로 날아오기 전까지만 해도 저는 제가 안데스 어느 시골에서 인디오들과 함께 감자 농사 지으면서,,, 저녁놀이 지는 흙집 마당에서 흙피리 불면서 그렇게 낭만적으로 지낼 줄 생각했었습니다. 10년전에 6천원짜리 ‘조우커’라는 싸구랴 양주가 인생의 방향을 제시했듯이 역시나 촌스런 노래 한 곡이 또 인생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전 싸구랴 인생인 것 같습니다.

 

13. 처음에 선생님께 코스타리카로 가겠노라 말씀드렸을 때 선생님께서는 조목조목 저의 생각을 물으셨습니다. 그냥 말없이 튈 걸 그랬는가 봅니다. 하여간, 선생님과 저 사이에 끊임없는 실랑이가 오고 가다가 급기야는 막판에 위협과 협박과 하여간 그러한 의미가 농후한 편지를 한 통 날렸고, 선생님으로부터 온 답신은 딱 한 줄이었습니다. “네 맘대로 해라”.

 

14. 코스타리카로 날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정말 인생 자체를 던져버리는 기분이었습니다. 분명, 내가 추구해 오던 삶의 방향에 대한 선택이었지만, 어느 순간 제동이 걸릴지도 모르는 나락으로 끝없이 떨어지고 있는 기분이었습니다. 당장 공항에 내리면 어디로 가야할지, 어디서 잘 수 있을지, 그야말로 정해진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15. 그래도 그 추락이 길진 않았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산호세 변두리에 방을 얻고, 말 배워 보겠다고 싸구랴 어학당에도 등록해보고, 옷가게에 취직도 해보고,,,, 그런데 역시 싸구랴 어학당이었던지,,, 개업 이후 4개월 만에 제가 처음 손님이었었는데,,, 제가 다니던 중 망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일하던 옷가게는 어느날 밤 도둑이 지붕을 뜯고 들어와서 옷을 싸그리 들고가는 바람에 또한 망해버리고 말았습니다.

 

16. 산호세에서 제가 살던 집에는 기가 막히게 사이 좋으신 할머니 할아버지 부부 한 쌍과, 네 명의 과부 할머니, 한 명의 젊은 과부아줌마, 그리고 저… 그렇게 총 7명의 여인과 한 명의 남자가 살았습니다. 그들의 다소 무료하던 삶에 저의 출현은 그야말로 한 편의 쌈빡한 늬우스 였습니다. 우리 할아버지는 새벽 4시 반만 되면 커피 먹자고 방문을 두드립니다. 네 명의 과부 할머니들은 제가 해 떨어지고 저녁 7시 정도에 잠시 외출한다고 하면 절대 허락할 수 없다고 펄쩍 뛰십니다. 젊은 과부 아줌마는 가끔 술에 잔뜩 취해 제방에 오셔서 자꾸만 술을 더 먹자고 하십니다.

 

17. 코스타리카에 도착한지 꼬박 일년이 되던 날, 눈물어린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의 배웅을 받으며 또 집을 떠났습니다. 산호세를 출발한 버스는 3000미터 이상되는 산들을 넘습니다. 대서양에서 몰려온 구름들이 태평양을 향해 넘어갑니다. 태평양으로 지는 해는 산 언저리에 황홀한 저녁노을을 수 놓습니다. 그런데 자꾸만 제 맘은 또 다시 한 번 인생을 던져버리는 기분입니다. 번지점프를 겁나서 해보지 못했지만, 아마도 그 기분일 것 같습니다. 어느 순간 저 꼭대기에 연결된 줄이 텅 하고,,, 제동을 걸어주기 전까지 끝없이 떨어지는 기분,,,, 과연 오늘은 또 어디서 잘 수 있을까,,,, 그저 열심히 기도 합니다. 세 끼 밥 굶지 않고, 한 데 잠 자지 않게 해달라고요,,,

 

18. 시계를 봅니다. 깜깜해서 바늘이 보이지 않습니다. 더듬더듬 머리 맡에 있는 해드랜턴을 찾아 비춥니다. 4시가 조금 넘은 시간입니다. 탁,, 탁,,, 장장 타는 소리가 들립니다. 꾸르륵 꾸르륵,, 커피 내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구멍 숭숭 난 지붕사이로 살짝 보니 아직도 별이 총총 합니다. 간 밤 추위를 털고 나서니, 부엌에서 안주인이 커피를 내리고 밀전병 비스무리한 또르띠쟈라는 음식을 만들고 있습니다. 바깥주인은 소 젖을 받으러 아랫집으로 내려갔습니다.

 

19. 시계를 봅니다. 오전 7시 반, 이런,,, 일 시작한지 한나절은 된 것 같은데, 이제 겨우 오전 7시 반입니다. 배는 고프고, 간 밤 내린 이슬로 옷은 다 젖었고, 공포의 빨강개미들은 자꾸만 살로 파고 들고,,, 도망가고 싶습니다. 10살 먹은 어린애들도 학비 벌어보겠다고 커피를 따는데,,, 차마 쪽팔려서 도망가긴 싫습니다. 어찌어찌 하다보니 점심시간입니다. 오전 9시, 커피밭 언저리에 둘러앉아 바나나 잎사귀에 싼 도시락을 폅니다. 쇼트닝에 볶은 쌀이 전부 입니다. 잘 넘어가지 않습니다. 괜히 주변을 어슬렁 거리는 동네 개들한테 한숟갈 두숟갈 인심을 씁니다. 동네 사람들은, 제가 개를 아주 잘 돌보는 착한 사람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저도 그냥 착한 척 합니다. 한번 씨익 웃으면서,,, 아,,, 양심이 찔립니다.

 

20. 시계를 봅니다. 일이 끝났습니다. 커피 밭 주인이 와서 하루 종일 딴 커피 무게를 답니다. 어떤 사람은 세 바구니 어떤 사람은 다섯 바구니, 저는 한 바구니도 채 되지 않습니다. 역시 또 한 번 쪽 팔립니다. 그냥, 10살 먹은 친구 바구니에 다 부어줍니다. 전 한마디로 ‘불량노동자’입니다. 저는 그렇다 치더라도 새벽 5시부터 8시간 땡볕에서 개미, 모기, 뱀과 싸워가며 일하고 번 돈이, 어떤 사람은 5달라, 어떤 사람은 3달라, 참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21. 녹슨 함석으로 만든 깡통집은 그야말로 열광의 도가니입니다. 한 낮 태양이 지글거리면 머리가 뜨거워서 바닥이 뜨거워서 도저히 집 안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올해 26살 먹은 바깥주인이 나를 위해 걸어 준 망고나무 사이 해먹으로 갑니다. 살랑살랑,,,, 흔들흔들,,,, 참 팔자가 좋습니다. 올해 20살 먹은 안주인은 커피밭 일을 마치고 와서도 잠시를 쉬지 않습니다. 움막 같은 집을 쓸고 닦고 쓸고 닦고,,,, 오후 세 시가 되면 불을 지피고 저녁을 준비 합니다. 사탕수수 끓인 물로 ‘단물’을 만듭니다. 쇼트닝으로 밥을 볶습니다. 오늘은 특식도 있습니다. 솥단지 뚜껑을 뒤집어 계란을 세 개나 굽습니다. 역시 쇼트닝에 범벅입니다.

 

22. 달력을 봅니다. 한 달 하고도 보름이 지났습니다. 첫날 밤 벼룩 때문에 한 잠도 자지 못하고 이를 갈았습니다. ‘내일이면 당장 나가리’, 그런데 정말 어쩌다보니 이렇게 시간이 빨리도 갔습니다. 판자로 대충 칸막이만 두른 방 안을 둘러 봅니다. 방 한구석 금쪽같이 귀한 커피 자루가 수북히 쌓여 있습니다. 집주인 내외가 저를 위해 특수 제작한 ‘사랑의 침대’입니다. 옷은 달랑 두 벌입니다. 한 벌은 입고 한 벌은 빨아 널고,,,, 다행이 날 더운 지역이라 옷 말리는데 시간이 길지는 않습니다. 방 입구에는 흙투성이 검정고무장화 한 켤레가 다소곳이 놓여져 있습니다. ‘사랑의 침대’ 위에는 손목시계, 일기장, 한국 떠나올 대 울 엄마가 나 몰래 짐 속에 넣어둔 성경책 그리고 해드랜턴 하나가 있습니다. 남대문에서 5천원주고 산 묵직한 해드랜턴에 눈독을 들이는 동네 사람들이 무지 많았지만, 차마 줄 수가 없습니다. 밤에 변소 갈 때 어찌나 유용하던지,,,, 가지고 있는 짐 다 꾸려봤자, 작은 배낭으로 하나도 채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23. 때 묻은 일기장을 휘리릭 넘겨 봅니다. 이곳에 오던 첫 주 어느날 일기는 딱 한 줄입니다. “내 인생에 산이 없었더라면 난 애저녁에 이곳을 떠났을 것이다”. 마치 8000미터 급 산에 오르내렸던 사람처럼 참,,, 멋있는 말을 썼습니다. 그러고 보면 전 가끔,, 너무도 뻔뻔스럽고 엉뚱하게 제 자신의 상황들을 합리화 시키는 것 같습니다. 왜 갑자기 산을 끄집어 들이는 것인지,,, ‘사랑의 침대’ 위에 모포 한장 덮고 누워 가만히 생각을 해봅니다. ‘그래,,,,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산 속에서 비박도 했었는데, 이 정도면 호텔이지,,,’. 방에 가끔 도마뱀이 출현을 합니다. 그리고 어느날 밤엔가는 쥐가 어찌나 나무로 만든 집을 심하게 갉아 먹어대던지,,, 아마 내일이면 집이 사라져버릴지도 모를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벼룩이도 한 밤중에 향연을 벌이는 모양입니다. 금방이라도 미쳐버릴 것 같다가도 가만히 생각을 해봅니다. ‘그래,,,, 산에는 곰도 있고 호랑이도 있을 수 있는데,,, 이정도면 애완동물이지,,,,’. 산호세를 떠나 이곳에 들어올 때 물은 반드시 끓여 먹으라는 강력한 충고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혼자서만 물을 끓여서 먹는 것도 좀 민망스럽고, 물 끓이것자고 불을 지피는 것이 부산스럽기도 해서 그냥 먹고 삽니다. 그러면서 가만히 생각을 해 봅니다. ‘그래,,, 그 동안 산에서 계곡물은 안 먹었나? 그나마도 없어서 못 먹을 때가 얼마나 많았는데,,,,’. 샤워장엔 아예 지붕조차도 없습니다. 그래도 일 끝나고 샤워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 줄 모르겠습니다. 한 두 번이 무섭고 어렵지 막상 하다보니 5천원짜리 싸우나 이상으로 달콤합니다. ‘그래,,,, 산에서는 세수는커녕 양치도 몇 날을 안하고 살기도 하는데,,,,’. 그리고 설걷이도 맘대로 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쇼트닝에 볶은 밥에, 누런 기름이 바닥 가득 내려앉은 밥은 참,,, 먹기가 그랬습니다. 아무런 반찬도 없이,, 그저 열량으로 먹는 음식입니다. 다시 말해 맛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배가 고프냐 안 고프냐의 문제입니다. 어느 순간 생각했습니다. ‘그래,,,, 그 동안 읽었던 해외원정르포 같은 기사를 보면,,,, 마지막 제 3캠프 정도에서는 비스켓 몇 조각만 먹고도 8천미터급 산에 오른다는데,,,, 이정도면 성찬이다’. 그저 식기도만 열심히 합니다. “하나님아부지, 고저고저 이 음식 먹고 배 안 아프게 해주시고 배 많이 부르게만 해주세요”.

 

24. 그런데 사실은 이렇게 상황들을 합리화 시키기 위해서만 산을 끌어들인 것은 아닙니다. 쌔가 빠지게 커피를 따다가도 잠시 멍하니 먼산을 바라봅니다. 산에서 아름다운 사람들과 함께 했던 시간들에 대한 아릿한 기억들이 스멀스멀 가슴으로 올라옵니다. 가슴이 따땃해집니다. 오후 1시에 작업을 끝내고 옷 빨아 널고 씻고 나면 할 일이 없습니다. 해먹에 할랑하게 누워 비몽사몽 저 멀리 ‘탈라망카’ 산맥을 바라봅니다. 가슴이 울렁울렁 거리면서 아름다운 사람들이 보고 싶어집니다. 정말로 다시 한 번 산을 오르면서 헉헉대고 킬킬 웃을 수 있는 그런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25. 오후 4시 반이면 저녁을 먹고 7시면 온동네가 전원 취침입니다. 오줌이 마려운 것도 아닌데 중간에 꼭 한번 눈이 떠집니다. 눈을 뜬다 해도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입니다. 가끔은 내가 눈을 뜨고 있는 것인지, 감고 있는 것인지 구분이 안되어 일부러 눈을 깜빡깜빡 거려봅니다. 그래도 역시나 알 수가 없습니다. 눈을 뜨고 있는 것인지, 감고 있는 것인지,,, 머리 맡을 더듬어 해드랜턴을 켜고 시계를 들여다 봅니다. 새벽이겠거니 하고 들여다본 시계는 대략 밤 10시를 조금 넘어가고 있습니다. 황당합니다. 서울에서라면 한참 활동하고 있을 시간인데,,,, 이 생각 저 생각 쉽게 다시 잠이 오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보고 싶어 집니다. ‘아무개는 지금쯤,,, 음,, 아마도 따끈한 방에서 테레비를 보고 있겠지’, ‘아무개는 지금쯤,,, 음,,, 아마도 추운 겨울 거리 어딘가에서 쏘주를 마시고 있을거여’, ‘음,,, 오늘이 그러고보니 수요일이구나,,,,’. 괜히 이름도 잘 모르는 등산학교 식구들이 막 보고 싶어집니다. 그 분위기가 막 그리워집니다. 어디서라도 먹고 자는 것은 쉽게 적응이 되는 것 같은데,,, 사람이 보고 싶은 것만은 참 쉽지가 않은 것 같습니다.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리는 기분입니다.

 

25. 생각해보니, 만 25년 동안 학생 아니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풀타임 스튜던트’였습니다. 가슴에 손수건 달고 할아버지 손잡고 국민학교 입학했을 때부터 주욱 생각해봅니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유난히 길게만 느껴지는 시간이 있습니다. 등산학교 다니던 때가 생각납니다. 그 동안 다녔던 학교 중에서 가장 짧은 기간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가장 길었던 시간으로 느껴집니다.

 

26. 25년을 풀타임스튜던트로 지내다보니, 참 주변사람들한테 입은 은혜가 어찌나 큰지 모르겠습니다. 말 만한 딸년이 시집도 안가고 있어서 동네 사람들 보기에 넘부끄럽다고 하시는 울아부지,,, 어느날 그 ‘말 만한 딸년’이 언제 인간구실 제대로 하고 살란가 싶어서 보험을 들었답니다. 상해보험, 질병보험, 생명보험 세 가지나 됩니다. 지난 여름, 코스타리카로 떠나오기 며칠 전에 아버지께 말씀드렸습니다. “아부지, 저 공부허로 코스타리카라는 나라로 갑니다”. 집 안이 발칵 뒤집어 졌습니다. “아니, 가라는 시집은 안가고 왜 자꼬만 어먼데(다른 곳)로만 가는거여~~”, 아부지 화가 불같습니다. “너 그리로 가고나면 난 느그 아부지한테 볶여서 못산다아아~~” 울엄마 탄식에 마음이 아픕니다. 울엄마 S.O.S 구조 요청에 달려오신 팔순이 다 되신 우리 고모님 “니가 시집을 안가고 외국으로 가번지믄,,,, 나랑 작은고모는 기냥,,, 팍 죽어불란다”. 그 와중에도 우리 작은고모님 당부를 잊지 않습니다. “아가, 어디에 가더라도 양띠 남자만 있으믄, 그냥 뒤통수만 보고라도 꽉 물어버려라. 양띠가 좋디야~~”. 마음이 아프지만 어쩔 수가 없습니다. “아부지, 코스타리카라는 나라가요, 미국보다 더 안전하고, 아름답고, 하여간 더 좋은 나랍니다”. 그 말에 그나마 어른들 화가 조금 누그러지시지만, 서울로 다시 올라오던 날 아침 우리 아버지, 하얀 봉투에 만원짜리를 두둑히 담아주십니다. “좌우지당간에, 돈이 얼마가 되었던지,,, 보험은 꼭 들고 나가야 헌다”.

 

27.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보험을 들라고 해도 보험 회사에서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번 만큼은 아버지 말씀 잘 들으려 했는데,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몫 돈이 생겼습니다. 하룻 밤을 그 돈으로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가, 등산학교에 입학해버렸습니다. 시간과 돈이 함께 공존하기는 지극히 드문 일인 것 같았으나, 그 순간 만큼은 시간과 돈을 함께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등산학교에 다니면서 어찌나 교육이 무섭던지, 처음엔 그저 무사히 살아서 하루빨리 졸업하기만을 간절히 바랬었습니다. 로프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내가 미친년이지, 그냥 어떻게 해서라도 보험을 들 것을,,, 왜 여기서 이러고 있나”하는 후회가 막급했습니다. 그리고 한 편으로는 “내가 여기서만 내려가면 정말 부모님 말씀 잘 듣고, 착허게 잘 살아야겠다” 하는 다짐도 수십 번 했습니다.

 

28. 그런데 정말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그래도 꾸역꾸역 올라가지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신력도 아니고 실력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아마도 그 때 우리 동기들, 그리고 선생님들, 저 끌어 올리느라 팔뚝에 펌핑 나셨을 것입니다. 몸이나 가벼워야죠,,,, 좀 무겁습니까?. 아래에서 보면 만만해 보이는 바위도 막상 떠억 붙고 보면 수직절벽입니다. 두 발에 두 손에,,,, 허부적 허부적, 이제는 죽는구나 생각하고 있으면, 어느 순간 몸이 붕붕붕 올라갑니다. 위에 올라간 동기들이 선생님 눈치보면서 열심히 땡겨 줍니다. 루트 파인딩을 열심히 하라고 하지만, 막상 붙고 보면 어디를 잡아야 할지 어디를 디뎌야 할지 눈에 보이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저 질량에 비례하는 중력의 힘을 원망하고 있을라치면, 어느 순간 선생님 발이 쓱 다가옵니다. 딛고 올라서라는 것입니다. 발까지는 디딜 수 있다고 칩니다. 그런데 어느 날엔가는 선생님 어깨도 밟았습니다. 아마 위치가 달랐다면 선생님은 머리라도 내 주셨을 것입니다. 산에서 별 희한한 음식들도 다 먹어봅니다. 쭈쭈바에 복숭아는 그렇다고 칩시다. 지짐이에 골뱅이에 국수 그리고 시원한 생맥주 까지도 먹어봅니다. 어느 날 우연히 선생님 배낭 한 번 매 보고 정말 놀랐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우리들 배낭보다 작고, 할랑해서 훨씬 가벼우리라 생각했었는데, 우리들 배낭은 쨉이 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그 속에 사랑이 가득 담겨져 있어 그렇게 무거웠나 봅니다.

 

29. 한국을 떠나오기 전 날 고향에 내려갔습니다. 부모님은 입장권을 끊고 굳이 플랫홈까지 따라 나오십니다. 저 멀리 기차 머리가 보입니다. 엄마가 손을 잡고 기도를 해 주십니다. 항상 속만 썩여 드리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픕니다. 괜히 눈물이 나올라고해서 서둘러 기차에 오릅니다. 기차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부모님이 창 밖으로 기차를 따라 오십니다. 갑자기 아버지가 소리쳐 물으십니다. “보험 들었냐아아~~?”. 창 밖을 향해 고개를 끄덕입니다. 보험 들었습니다. 어디서라도 어려울 때 누군가는 손 내밀어 줄 것입니다. 어디서라도 미끄러질 때 누군가는 받쳐 줄 것입니다. 어디서라도 배고프고 목마를 때 누군가는 먹여 줄 것입니다. 그리고 바위에도 붙어 봤는데, 어디서라도 두 발이 땅에 닿아 있기만 한다면 잘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등산학교 선생님, 선배님 그리고 동기들이 제게 가르쳐 준 ‘인생의 보험’인 것 같습니다. 설령 인생을 내 던지는 기분이 들지라도 어느 순간 제동이 걸릴 것입니다.

 

30. 의기양양하게 지붕을 붕붕 날라다니던 쥐 한마리가 침대 옆으로 퍽 하고 떨어졌습니다. 하긴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는데, 쥐라고 아니 떨어지겠습니까? 침대에 누워있던 저도 놀랐지만, 쥐도 상당히 놀랐는가 봅니다. 1-2초 정도 정신을 못차리더니 허둥지둥 다시 벽을 타고 올라갑니다. 저도 놀란 가슴이 조금 진정됩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추락의 충격이 컸던지, 허둥지둥 벽을 타고 올라가던 쥐가 다시 떨어집니다. 이번에는 침대위로 떨어졌습니다. 저 역시 너무 놀라 소리도 못 질렀습니다. 숨도 못 쉬었습니다. 쥐가 다시 허둥지둥 지붕으로 올라간 다음에서야 휘유 하고 숨을 내 쉽니다. “짜식, 나처럼 등산학교 제대로 댕겼으면, 그런 일 없었을 텐데…”

 

31. 방정떨다가 두 번 씩이나 떨어진 쥐 때문에, 아름다운 분위기가 다 망가졌습니다. 등골에선 여전히 땀이 흐릅니다. 한참, 구멍 뚫린 지붕 사이로 이 별, 저 별 맞춰 보면서, 아름다운 생각들을 하고 있었습니다. 커피 밭 한 가운데 있는 집 뒷마당에 나가 밤하늘 별을 봅니다. 별은 하늘에서 저 멀리 땅까지 닿아 있습니다. 소금을 뿌려 놓은 것 같습니다. 별을 보면 유난히 사람들이 보고 싶습니다. 한 해가 가는 마당이라 더욱 그런가 봅니다. 한국산악회 등산학교 선생님들, 이름도 잘 알지 못하는 선배님들, 그리고 우리 동기님들, 너무 많이 받기만 한 것 같아 죄송스런 마음이 앞섭니다. 혹시라도 훗날 제가 가르치는 입장에 서게 된다면, 등산학교에서 배웠던 그 따뜻함과 사랑을 닮고 싶습니다. 내일이면 그 동안 지냈던 시골 생활을 청산하고, 파나마로 넘어갑니다. 과야미 족 인디언들이 사는 곳으로 가게 됩니다. 역시나 정해 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냥 간다는 것 말고는,,, 인생을 던지는 기분이지만, 어느 순간에는 제동이 걸릴 것이라고 믿습니다.

 

32.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인사 치고는 너무 길게 써버린 것 같습니다. 제가 워낙에 ‘개념’없이 살다보니, 정말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어 버렸습니다. 아무래도 저의 한계? 인 것 같습니다. 흐~~~. 요약해보도록 하겠습니다.

 

33.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아버지가 주신 보험금 들고 등산학교로 튄 것은 참 잘한 일인것 같습니다. 보고 싶은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아마 이곳에 일일이 열거 하자면, 또 지금까지 쓴 만큼의 글이 될 것 같습니다. 그냥 참겠습니다. 보고 싶은 사람들 모두모두 따뜻한 연말과 행복한 새해 맞이하시기를,,,, 기도 드리겠습니다.

 

2002.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