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만에 포스팅을 합니다. 4.11 이후 약간의 멘붕 상태가 되었었습니다.
짧은 시간에 극복하고 다시 돌아왔습니다. 바뀔 수 없는 현실의 한계. 그것을 프로야구에서 보았습니다.
정치색과는 무관하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끼리는 현실이고, 이상은 미래인것 같군요.
19세기 초, 미국에서 노예제 폐기와 존속을 가지고 피터지게(?) 싸우던 시절.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한 사람으로서의 다수(majority of one)'을 얘기하였습니다.
정의와 진실이 무엇인지 안다 하더라도 우리는 대세에 역류해 정의를 주장하는 건 소시민의 본분을 벗어난, 미친 짓으로 간주돼어 왔었고,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바로!!! 그 법칙을 의심할 것으로 제안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깁니다.
"나는 이것만은 알고 있다. 즉, 이 매사추세츠주 안에서 천 사람이, 아니 백 사람이, 아니 내가 이름을 댈 수 있는 열 사람이, 아니 단 한 명의 정직한 사람이라도 노예 소유를 그만두고 실제로 노예제도의 방조자의 입장에서 물러나면 그 때문에 형무소에 갇힌다면 미국에서 노예제도가 폐지되리라는 것을 말이다. 시작이 아무리 작은 듯이 보여도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기껏해야 거기에 대해 토론만 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열변을 토하면서도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듯하다. 너무도 단순하고, 기본이어서 그걸 모르는 않는다는 듯.... 정녕! 우리에게 필요한 말로 호소하였다.
"당신의 온몸으로 투표하라. 단지 한 조각의 종이가 아니라 당신의 영향력 전부를 던져라. 소수가 무력한 것은 다수에게 다소곳이 순응하고 있을 때이다. 그때는 이미 소수라고 할 수도 없다. 그러나 소수가 전력을 다해 막을 때 거역할 수 없는 힘을 갖게 된다. 의로운 사람을 모두 감옥에 잡아 가둔다든가, 아니면 정의와 진실을 위해 기득권을 포기해야 한다든가의 양재택일을 해야 한다면 정부는 어떤 길을 택할지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많은 사람이 감옥에 가 있고, 누군가가 더 감옥에 가야 한다면 이미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너무도 자명한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의 선택은 마지막 순간에 망설임으로 버무려 지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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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