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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veller/Mountaineering

[10th,Aug,2001]2001년 손금보듯 계곡등반

2001년 설악산 계곡산행 후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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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손금보듯 계곡등반
[남설악 재량골-귀때기골-수렴동-쌍폭골-공용능선-잦은바위골-설악동]
 
 
프롤로그
언뜻 스쳐 간 것이었지만 설악을 다시 찾지 않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리움은 그리움으로 남을 때가 가장 어울리는 모습이라고… 그러나 당치도 않은 생각이었음을 느꼈다.

엉뚱하게도 그런 생각은 언젠가 지리산에서, 아니 지리산에서 돌아온 후에 설악을 느끼기 시작했다.

설악산이 그립다, 참을 수 없을 만큼. 그래서 어쩌면 지리산에 괜히 갔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과 함께…

가끔 책상 서랍에서 지도를 꺼내어본다. 그리고는 최대한 천천히, 그러나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손가락을 따라 길을 짚어 본다.

백담사에서 오세암으로, 공룡을 타고 희운각으로, 서북주능에서 큰귀때기골로,

다시 가야동으로, 봉정암으로, 천불동으로… 다시 차를 타고 십이선녀탕으로, 대승령으로, 장수대로…

그리고 백두대간의 길목 북 주능을 거쳐 미시령으로…


그러나 지도는 너무나 초라하다. 햇살 내리쬐는 봄날의 화사한 모습도,

휘영청 달 밝은 여름밤의 풀벌레 소리도, 너무나도 화려한 그래서 쓸쓸해 보이는 단풍 물든 내설악의 꽃밭 같은 모습도,

눈 내리는 아침 외설악의 그 엄숙함도, 비바람 휘몰아치는 성난 모습도, 촉촉이 비에 젖는 다소곳한 모습도,

그 어느 것도 지도는 보여주지 못한다. 그래서 지도는 꼭 백지 같다. 어느 그림이건 마음대로 그릴 수 있는 백지.
그 하얀 백지 위에 설악을 그리기 위해 올해도 여느 때와 같이 다시 설악을 찾아간다.

설악은 언제나 똑같은 자리에서 우리를 맞이해준다. 가끔은 왜 이제야 왔느냐는 푸념 같은 비를 흩뿌리면서…
< 어느 해 설악을 그리며 적은 글 중에서…>


 8월 3일


재량 골 초입에 11명의 전사를 떨구어 낸 버스는

줄인 무게를 자랑이라도 하듯 힘찬 배기음을 뿜어대며 오름 짓을 하여 우리 곁을 떠나버리고,

보름이 가까워지기라도 한 것일까? 동그란 달님의 얼굴이 재량 골 초입을 밝힌다.

 

지난겨울. 허리까지 빠지는 설산 산행.

문득 떠오르는 채식 형의 표정에 미소를 지어 보이며 100여 미터를 지나니 10여 명이 눕기에 충분한 공터가 나온다.

오늘 하룻밤을 쉬어가기에 충분하다.

빠른 동작으로 자리를 정리하고, 나뭇가지 사이로 비쳐오는 달빛을 자장가 삼아 하루를 흘려보낸다.

새벽의 느낌을 기다리면서…


 

8월 4일


4시 30분. 인간의 본능일까? 어김없이 눈을 뜨는 시간이다.

특별히 챙길 것도 없이 배낭을 꾸리고 재량 골 깊은 계곡으로 몸을 맡기러 간다.

깊은 계곡 탓일까? 아직은 랜턴에 의지해가며 옮기는 발걸음이 무척이나 가볍다.

바로 옆으로 물소리가 들리고, 아직 스러지지 않은 달빛의 여운을 친구삼아 발을 옮기다 보니 작은 폭이 나타난다.

오른쪽으로는 굵은 고정 확보 줄이 묶여 있고, 꽤 넓게 물길이 퍼져 있다.


‘그래! 바로 저 위에서 지난겨울 채식 형의 애처로운 눈빛을 보았지.’ 쓴웃음을 한 번 지어 보내고 멀리 점봉산을 바라본다.

지금쯤이면 주전골의 계곡도 여름의 자태를 뽐내며 굵은 물줄기를 뿜어내고 있겠지. 문득 주전골의 단풍이 기다려진다.

얼마 전에는 설악의 빙폭이 그리워 허공에 바일을 휘두르게 하더니 오늘은 단풍이라니… 너무 앞서 가는 것일까?

앞에 가던 은주가 계곡 산행 신고를 한다. 계곡에 들어왔으니 일찌감치 계곡과 하나 되고 싶었을까?

그나저나 무릎을 찧은 것 같은데 괜찮단다.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늦은 아침을 해결하였다.

모두 배낭의 무게 때문일까? 배고픔 때문일까? 서로들 자기 것을 먹어보라고들 한다.

이들과 3일을 같이 움직여야 한다. 재량 골을 넘어 귀때기골로, 구곡담으로 쌍폭골로, 다시금 공룡능선을 거쳐 잦은바위골로…

3일을 함께 할 산우들이다. 많이 힘들지도 모른다. 많게는 3년, 짧게는 이제 몇 개월을 함께 했을 뿐이다.

누군가에게는 이번 산행이 우리들의 마지막 산행이 될지도 모르겠지.

그냥 스쳐 지나가는… 그러고 싶지는 않지만, 지난 시간의 기억들이 똬리를 틀듯이 되살아난다.


재량 골. 지난겨울의 기억 때문이었나? 무척이나 길게 느껴지던 계곡 길이 좁아지고 있다.

하늘 금이 내 눈높이까지 내려왔다. 우측으로 귀때기청봉이 깊은 너덜을 품에 안고 아는 척을 한다.


귀때기청봉 안부에 야영하는 팀이 있다.

이제부터는 부시 지대를 치고 내려가야 하니 옷도 갈아입고 잠시 쉬어갈 겸 배낭을 내려놓는데

뒤에 오던 종현 형이 야영하던 팀에게 반갑게 인사를 한다. 같은 산악회 선배님이시란다.

한 가족 팀이다. 엄마, 아빠, 그리고 딸… 내게 저런 모습이 있을 수 있을까?

지금부터 열심히 노력(?)해도 15년의 세월이 지나야 가능하겠군 하는 생각을 하니 쓴웃음이 한 거품 배어 나온다.

능선에 올라서 세상을 본다. 건너편으로 보이는 황철봉을 내려와 이어지는 공룡의 숨결이 대청을 거쳐 이곳까지 전해온다.

고개를 돌려 안산 쪽을 바라본다. 지금쯤 A팀은 어느 곳에 있을까?

아침 9시. 십이선녀탕 계곡에서 물장구를 치고 있을까? 아님, 벌써 흑선동으로 내려섰을까?

 

한계령 고갯길을 뒤로하고 희미하게 나 있는 흔적을 따라 큰귀때기골 초입을 찾아 부시를 치고 내려간다.

부시야 그럭저럭 칠만한데, 이놈의 칡넝쿨이 지나는 과객의 발걸음을 잡아채는 것이 헤어지기 아쉬운가 보다.

30여 분을 그렇게 치고 내려오니 희미한 등산로의 흔적이 점점 선명해진다.

순간 길을 잘못 들어섰나 하는 착각에 빠지리만큼 너무 선명한 등산로다.

우측으로 우리와 함께 가는 능선이 쉰길폭포 위로 난 능선이 틀림없으니 잘못 들어선 길을 아닌데, 이렇게 길이 좋을 수가?

 

물줄기 소리가 가까워지는 것을 보니 폭포가 가까워졌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수량이 풍부하다.

중간중간 길을 버리고 물속에 첨벙거리면서 계곡 산행임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킨다.

물줄기가 바빠지고, 폭포 소리가 들린다. 쉰길폭포인가 보다.

50M가 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믿는 구석이 있으니 하면서 장비착용을 했다.

테이프 슬링으로 하네스를 급조하고, 버림 끈으로 하강 포인트를 만드는데, 선용이 형이 안전벨트를 꺼낸다.

역삼동에서 출발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네스가 무사하게 배낭에서 나올 수 있었다나…

 

첫 하강이라는 이유만으로 선용 형의 하네스를 빼앗듯이 착용하고 50M 줄 두 가닥을 폭포 왼쪽으로 내렸다.

만약을 대비해 등강기를 챙겼다.

우거진 나무 사이로 꼬인 줄을 풀어가면서 내려가는 그 길이 엄청난 시련을 줄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30여 미터를 하강하고 꼬인 줄을 풀어내리니 줄의 끝이 폭포 중간에서 대롱거린다.

중간에 이어주는 하강 포인트를 찾아보니 모두 이끼 위에 불안한 듯 자라는 잡목뿐이다.

왼쪽에 있는 믿음직스러운 포인트까지는 꽤나 길고, 횡단하는 것이 만만치 않아 보인다.

폭포를 건너 오른편을 보니 중간 부분에 꽤 쓸만한 나무가 보인다.

물줄기가 차기는 했지만, 그럭저럭 견딜만하기에 횡단하기로 한다.

 

폭포를 지나 펜듈럼으로 넘어가야 하는데 이끼 때문에 매번 미끄러지기만 한다.

어센더를 한쪽 로프에 걸고 등반을 시도한다. 이미 몸은 얼어버린 듯 손끝이 아려온다.

한 스텝, 한 스텝을 조심스럽게 넘어가며 우측으로 우측으로…

이제 거의 다 왔다. 이번 한 스텝만 넘어가면 되는데 갑자기 손이 빠지면서 폭포의 중앙 물길 속에 몸뚱이를 처박는다.

으~~C. 무릎이 꽤 아프다. 다시 한 번 시도. 결과는 참패. 으슬으슬 떨려오는 몸으로 더 이상의 시도는 힘들어 보인다.

 

다시 좌측으로… 아까 보았던 곳으로 트래버스를 하려는데 종현 형이 내려온다.

내가 매달리기 시작한 지 한 시간이 지났다나!

‘그럼, 난 한 시간 동안 물속에서…헉~~~’ 종현 형과 상황을 의논하고 좌측으로 트래버스. 확보점 안착.

‘후~ 종현 형 다시 올라가는데 쉽지 않았을걸?’

 

깜박 졸았다.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에 눈을 떠 이곳으로 확보점으로 안내를 하고 다음 하강 준비를 한다.

몇 명은 폭포 위 능선으로 돌아가고 일부만 이곳으로 하강이다.

무사하게 하강을 마치고 내려서니 이곳에서만 3시간을 소비했다.


먼저 내려온 동료들에게 식사 준비를 부탁하고, 몸을 추스른다.

라면을 끊이고, 몇 개의 수류탄을 터뜨리고 – 이제부터는 진짜 계곡 산행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

한숨 돌린 후에 다시금 여정을 시작한다.

 

곧이어 3단 폭포가 나타난다. 좌측으로 이어지는 협곡 위의 길을 따라 한 구비를 도는데 앞서 가던 영호 형이 멈칫한다.

뱀이란다. ‘헉~ 뱀. 난 시저. 이 세상에서 뱀이 젤 싫단 말이야~~~’ 하얗게 질려버린 티를 안 내려 하지만 쉽지 않다.

겨우겨우 뱀이 있었다는 곳을 통과. 로프를 고정하여 내려서고, 다시 연결하기를 몇 번.

이제는 물길이 완만해지면서 하늘이 열린다. 18시쯤에 축성암 터를 지나 18시 30분쯤에는 작은 귀때기 골과의 합수점을 지난다.

‘에구~ A팀이 무척 기다리겠군’ 하는 생각이 든다. 예정대로라면 2시간 정도는 절약할 수 있었는데…

백담 계곡을 내려서 넓은 하늘을 보니 오늘 하루의 날씨가 어땠는지 문득 궁금해진다.
이제 10여 분이면 목적지까지 도착하겠지 하는 생각으로 동료들을 기다리는데, A팀의 얼굴이 보인다.

 

 

8월 5일
한때, 선한 눈동자를 가진 사람들이 그 숲길을 오고 갔다.
경쾌한 노동의 발자국이 휘파람을 지나가고 가끔은 뜨거운 사랑의 시어가 송진 내음처럼 흩날렸다.

언제부턴가 그 숲길은 인적이 끊겼고 모든 것이 그냥 흙 속으로 낭비되었다.
꿀은 썩어갔고, 땔감의 솔방울들은 주인을 잃은 채 방치되었다.
두려움 많던 다람쥐들만이 당당하게 뛰놀기 시작했다.

떠나간 사람들은 생의 황량함을 느낄 적마다 그 숲길을 그리워했다.
하여 다시 찾았을 때 그곳은 잡초덤불 우거진, 가지 못하는 길이었고-
사람들은 이내 투덜거리며 되돌아갔다.

그 후로 오랜 세월이 지나갔다, 떠나간 이들은 하나둘 주검으로 되돌아왔고 그 지워진 숲길에 가득 묻혀갔다.
그리고 무덤 속에 누운 후에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그 숲길을 지날 수 없게 한 것은, 바로 그들 자신이었음을

(유하, 가지 않는 길)
5시. ‘하루의 산행을 시작하세! 빨간 배낭을 등에 메고…’
흥겨운 콧노래로 하루를 시작한다. A팀 몰래 곰 골 비박지를 빠져나오듯 줄달음쳐 등산로로 접어든다.

백담사에서 수렴동으로 오르던 계곡.

내가 혼자의 몸으로 설악을 처음 찾았을 때.

그때만큼 설렘도 덜 하고, 산을 바라보는 마음도 많이 변했건만 언제나 수렴동 계곡은 어머님의 품같이 푸근하다.

 

넓은 산책로를 따라 유람하는 방랑자의 기분으로 수렴동 산장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해본다.

3일 중에 가장 긴 여정이기에 일반 등산로에서 시간을 절약하기로 했다.

월요일에 출근이라는 민철이를 오세암으로 떨구어 보내는데, 이 녀석이 떨어지기 싫은가 보다.

어릴 적 동네 어귀까지 따라오던 멍멍이를 집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날리던 돌팔매처럼

아쉬움을 가득 담아 민철이를 보내고는 10명의 전사로 하루를 시작한다.

수렴동 대피소에 도착하여 아침(?)을 준비한다.

떡라면을 끓이고, 미숫가루를 타고… 준비해 온 식사를 만드는 데,

찬일이가 어젯밤 종현 형으로 넘겨받아 부서지지 않도록 가져왔다는 국수를 삶자고 꺼낸다.

순간, 사람들이 찬일이를 향해 눈빛을 보낸다. ‘그건, 그냥 집어넣어라. 이따 먹자…’

 

아침으로 에너지를 보충하고 수통 가득 물을 채워 쌍폭으로 향한다.

수렴동 계곡 물은 봉정암 X물이라는 말을 꺼내면서…

너무 오랜만이어서일까? 곳곳에 설치해 놓은 철 계단들이 무척 낯설게 느껴진다. 별로 마음에 들지도 않고…

 

일반 등산로에선 시간 절약이라고 재촉하며 꾸역꾸역 발걸음을 옮겨 쌍폭 철 다리 밑에 도착한 시간이 8시 30분을 가리킨다.

앞으로 진행할 루트와 예정 시각을 대원에게 얘기한다.

철 다리 건너 오른쪽으로 나 있는 희미한 등산로를 따라 쌍폭골로 진입하니, 우측으로 용아장성이 우리를 품어주고 있다.

 

등산로가 끝나갈 때쯤 계곡으로 들어서 계곡 물을 한 움큼 집어 먹는다.

이 골은 봉정암하고는 인연이 멀기에 이렇듯 차고 맑은 물을 간직할 수 있었나 보다.

선용 형을 선두로 세우고,

어제 큰귀때기골에서 무릎을 희생하며 두 바퀴의 멋진 회전 묘기를 보여준 은주를 두 번째로 세우고 내가 그 뒤를 따른다.

새끼발가락을 다쳤다는 선용 형, 어제는 물 근처에도 안 가더니 오늘은 길 찾을 생각도 하지 않고 처음부터 계곡을 첨벙거린다.

사람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는, 푸른 이끼와 계곡 물줄기가 너무나 예쁜 그런 계곡을 따라 한 걸음을 옮겨본다.

중간중간 열리는 하늘 사이로 건너편의 용아릉이 우리를 보듬어 준다.

모두 물속에 첨벙거리며 ‘어~ 발 시리다.’라는 말을 내뱉는다.

작은 폭포도, 협곡도 물속으로 진행하는데 찬일이는 물에 안 빠질 거라며 용을 쓴다.

돌아가고, 비껴가고, 건너뛰고… 중간에 폭포 같지 않은 폭포에 앉아 모두 수영(?)을 하고 몸을 적신다.

 

물줄기 속에서 앉아 마음을 달래는데 은주가 뒤에서 서 있다.

몬 일인가 해서 자리를 비켜주니 본인도 그대로 물속에 첨벙. ‘어~~ 얘가 왜 이래???’

아직도 무슨 맘으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모~ 그딴 게 중요하리. 그저 우리는 하나인 것을…

계곡의 물줄기가 약해지고 중간중간 마른 계곡이 나타날 때쯤 배낭을 풀었다.

찬일이가 이번에는 하면서 국수를 꺼낸다. 국수 3인분. 포장지에는 분명히 3인분이라고 쓰여 있었다.

물을 끓이고, 3분 짜장을 데우고, 국수를 삶아 찬물에 헹구면서 본 동료들의 눈빛들이란…

 

3명은 짜장에 비빈다고 하여 조금 떼어주고 꺼내 놓은 김치와 고추장을 넣고 비빈다.

정확히 7 등분 하여 한 젓가락씩 덜어주고, 남은 국물도 마찬가지로…

그런데 짜짱국수를 이미 작살 낸 3명이 침을 흘리는 건 복날 개 혓바닥 보는 듯 하다.

3인분의 국수로 10명의 한 끼 식사 뚝딱~~.

다시금 갈 채비를 꾸리는 데, 상상할 수 없는 경원이의 발악이다.

배낭에서 양주병을 보더니 한참이나 찡그려진 얼굴에 약간의 분노까지 곁들이면서 ‘모야~ 이거. 이거 버리고 가!’,

어~허, 오호통재라! 경원이가 반쯤이나 남아있는 술병을 버린다니

발이 시려 들어가기 싫었던 계곡 물이 끓어 넘치고, 건너편의 용아릉이 이곳으로 줄달음쳐 온다. 버려진 술병 주우러…

– 이름도 모르는 술이었지만, 많은 사연을 간직하게 된 그 문제의 A팀 양진승 님의 그 술병 –

 

어젯밤 재호 형 옆에 앉아 주선 놀음을 하더니 호되게 당한 모양이다.

아니~ 재호 형 옆이라서가 아니었을 게다.

한쪽에는 유수복 님을, 다른 한쪽에는 이은주를 벗 삼아 술잔을 들이켰으니, 그게 어디 술이었을까?

혹이나 용아릉이 술병을 집어갈까 얼른 내 배낭에 쑤셔 넣고, 서북주능을 향해 발걸음을 옮겨본다.

끝나리라 생각했던 계곡은 마지막까지 자신의 존재를 확인시켜주고 있다.

 

중간중간 매달려 있는 쓰레기들로 주능에 가까워졌음을 짐작하는데 천하 명당자리에 심마니 움막이 자리하고 있다.

지난 폭우 때 움막의 가재도구들이 모두 계곡으로 유량을 떠났나 보다.

영호 형이 일러주는 향기 좋은 그 풀 내음을 하나 가득 담아 끝 청을 향해 다시금 부시를 치고 오른다. 한 손에 나이프를 쥐고…

하늘 금이 내 눈높이쯤에 다다랐을 때 쌍폭 이후 들려오는 사람들의 목소리…

고빗사위를 넘어서듯 끝 청에 올라 검은 운무 가득한 대청을 바라보면서 지리공부 한 판을 때린다.

멀리 1,275봉이 넘어 범 봉이 내일의 여정을 상기시킨다.

어제 속살을 보고 온 귀때기청봉이 오늘은 의연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미시령에 북 주능을 거쳐 내려온 백두대간이 한계령을 넘어 점봉산, 오대산으로 이어지면서 시나브로 시야에서 사라져간다.

중 청의 공룡 알에는 무엇이 들어있을까를 얘기하면서 도착한 텅 비어있는 설악산장(예전 중청산장),

과연 오늘이 일요일인가 하는 의구심을 자아낸다.

대청봉. 무척이나 오랜만이다. 언젠가부터 설악에 와도 대청봉에 오르는 일이 없어졌다.

천화대로, 칠형제봉으로, 장군봉으로. 그리고 토왕폭으로…

설악산장의 눈길을 피해 희운각 산장으로 떨어지는 가파른 백두대간 길을 따라 내려서니

희운각에는 벌써 도착한 A팀의 목소리에 환한 웃음이 배어 나온다.


 

산 따라 물 따라

A팀은 일찍 도착하였나 보다. 소복이 쌓여있는 시간의 잔해들이 재호 형의 풍성함 만큼 반갑다.

하루를 쉬어갈 과객의 쉼터를 정리하고 식사준비를 한다.

민철에게 받은 – 어제저녁에는 민철이가 내 밥을 먹었기에 – 햇반까지 조금은 넉넉한 식사에

경원이가 버리는 것을 주어온 이름 모를 양주 반병까지 곁들여 하루의 안식을 시작한다.

 

대청에서는 그리도 힘겨운 표정을 보이던 동료들의 얼굴이 활짝 개었다. 경원이만 빼고…

쓰러져 있는 경원이에게 억지로 저녁을 먹이고 들여보낸다. 일찍 자면 조금 나아지려나?

은주도 다리를 절룩이는 게 불안하기는 마찬가지. 이틀 만에 전장의 훈장들을 하나둘 달고 다닌다.

아침에 둘의 상태를 봐서 천불동으로 내려보낼 생각을 하니 씁쓸하다.

둘 다 천불동으로 보내면 호락호락 내려갈 녀석들이 아닌데…

그나저나 하룻밤 설악의 정기를 받아 좋아져야 할 텐데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몸은 대형 천막 안에서 환균 형이 가지고 올라온 삼겹살에 곡차를 즐기고 있다.

설악아 잘 있거라 내 또다시 내게 오마
포근한 네 품속을 어디 간들 잊으리오
철쭉꽃 붉게 피어 웃음-지는데…
아아 아아아 나는 어이 해 가야 하나

선녀봉 설운 전설 속삭이는 토왕성아
밤이슬 흠뻑 젖어 손짓하던 울산암아
나 항상 너를 반겨 여기 살고 픈데
아아, 아아아 아~ 아아 나는 또다시 네게 오마
<후략>

이런 코끝이 찡하다. 그동안 설악의 밤하늘을 헤아리며 지낸 날이 얼마인데, 아직도 첫 느낌 그대로이다.

내일이면 설악의 품을 벗어난다 생각하니 마음이 쓰리다. 쓰린 가슴 위로 찬 소주를 부어 넣고…

찬일, 은주에게 내일 출발시각을 일러주고, 일찍 일어나라고 일렀더니 아니~ 이것들이… 일어날 자신이 없다나~~

“허~ 그래! 그럼 내가 깨우러 오마”하고 나도 또 하룻밤의 설악의 전설을 만들어간다.


 

8월 6일


4시 30분. 예상보다 30분 늦게 눈을 떴다. 찬일이하고 은주를 깨우고 배낭을 꾸리고… 식사를 하고…

오늘은 운행 중에 중간까지는 물이 없기에 이곳에서 식사하고 가기로 했다.

동료들의 몸 상태를 보니 경원이는 밤새 많이 회복되어 보이고, 은주는 그대로인 듯하다.

잠시 생각을 하다 ‘그래! 마지막까지 같이 가자”하는 생각으로 출발(5:30)

무너미 고개를 넘어 공룡능선을 간다.

어느 해이던가? 한겨울 폭설 속에서 보낸 공룡능선 상의 일주일.

온종일 운행을 해도 돌아보면 어젯밤의 캠프사이트가 바로 밑에 보이던 그 허탈감.

5일 만에 마등령에 도착하고 설악동에 도착해서 여기저기 전화를 해서 존재를 알렸던…

1,275봉이 앞에 서 있다. 범 봉 능선을 바라보면서 우측으로 접어들었다.

범 봉까지 가서 잦은바위골로 접어들 예정이었지만,

조금이라도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잦은바위골 초입으로 잡목지대를 뚫고 내려간다.

짧은 몇 번의 하강을 하고, 마른 계곡을 내려가는데, 잦은바위골의 수량이 너무 적어 보인다.

그리 더운 날씨가 아니라서 계곡에 첨벙거리지 않아도 시원하다.

뒤에선 언제 폭포가 나타나느냐고 안달을 하며 걸음을 재촉한다.

겨울에는 몇 번을 등반했던 계곡이지만 여름에는 나도 초행이다. 더구나 잦은바위골로 내려서는 건…

여름의 100미터 폭은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진다.

수량은 괜찮을까? 하강 포인트는? 하면서 걷다 보니 깎아지른 벼랑 밑으로 물줄기가 모인다.

간이 안전벨트를 착용하게 하고 로프를 설치한다.

 

그런데 이런~~ 시원한 폭포하강을 약속했는데… 하강 루트가 폭포 오른쪽으로 잡힌다.

음~. 하강을 하면서 폭포 중간으로 하강하려고 두어 번 애쓰다가 이끼 덕분에 포기하고 마른 바위에 안착하였다.

몇 명이 하강하고… 문득 위를 보는데 배낭이 빨갛다.

오잉~ 경원이가 어젯밤 수복 님에게 받은 침낭을 보호한다고 배낭 커버를 씌우고 내려올 준비를 한다.

서둘러 하강 루트를 변경, 폭포를 횡단하여 작은 소에 안착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폭포 속으로 아니 갈려고 반항하는 경원이를 아래쪽에서 로프를 잡아당겨 간단히 해결하고 그다음부터는 모두~~~.

내 종아리만큼이나 예쁘고 가냘픈 나무와 몇 개의 하켄이 박혀있는 하강 포인트를 이용하여 100미터 폭의 하단을 하강하는데

앞으로 보이는 화채릉이 끝나 가는 여정의 쓸쓸함을 달랜다.

 

100미터 폭에서 5분여를 진행하니 50미터 폭이 나타난다.

음… 예전의 기억을 되살려 오른쪽 하강 포인트를 버리고 왼쪽 하강 포인트에서 하강 준비를 하니 몇 명이 투덜(?)거린다.

저쪽에서 하강하면 물에 안 적시고 내려갈 수 있는데 왜? 이쪽으로 하강하느냐고? 그건 내려와 보면 알죠… 하.하.하.

 

폭포 한중간으로 하강하여 넓은 소에 내려섰다. 배낭을 내려놓고 소를 가로질러 다음 사람을 기다린다.

몇 번째던가. 경원이가 내려오더니 물세례를 피하고자 몸부림을 친다.

아무래도 안 되겠구나 싶었는지 포기를 하더니만 배낭을 들러 머리 위로 올린다.

허~ 수복 님의 침낭을 지키기 위한 저 처절한 몸부림.

그러나 물이 허리까지 빠지는 상태에서 손은 만세를 부르고 있으니 먹이를 노리는 하이에나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먹잇감이다.

 

몇 번의 물세례에 뒤뚱거리더니 배낭도 몸도 물속에 풍덩…

이렇게 전사들은 하나둘씩 늘어가고, 은주가 내려오니 또 경원이가 등에서 배낭을 가로채 보호하려 안간힘을 쓴다.

배낭만을 지키는 모습을 보자니 사냥꾼에게 들켜 머리만 수풀 속으로 처박는 꿩이 떠오른다.

그러나 그 배낭마저도 물속에 한번 잠수를 마치고 물 위에 둥~둥~~


물속에 오래 있었더니 춥다.

이제 종현 형하고 선용 형이 남았는데, 다들 재미가 없는지 돌밭에 앉아 일광욕이다.

왜? 우리에게는 안 하느냐고 한 소리 뱉어내더니 스스로 물속으로 첨벙.

바다에서 수영을 배웠다는 찬일이는 눈을 뜨고 잠수를 한 덕분에 퀵드로우 1세트와 스나그 하나를 포획하였다.

이제 오늘의 여정이 끝나 간다. 계곡 중간의 큰 바위들을 뛰어넘으며 지나온 3일간의 여정을 되돌아본다.

비선대의 빨간 철 다리를 넘어 동동주 한잔에 설악에게 묻는다.
아니, 나 자신에게 묻는다.
난 무엇 때문에 이런 여정을 시작했는지?
그리고 왜 이곳에서 끝내는지?

다시금 찾아올 그 날을 기다리면서…